심리 관련 이야기

인생각본: "앞으로 어떤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justhong 2022. 3. 21. 11:50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를 두고 미성년자와 성년자의 관계를 오도 혹은 미화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어떤 감흥을 받는지는 시청자의 몫이므로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내용이 미칠 부정적인 영향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동화적인' 세계만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있지도 않은 세상에 대한 프로퍼갠더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의 결론을 도출하기 바랄 뿐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면 IMF의 여파로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큰 아들인 극중 인물 백이진은 딱히 갈 곳이 없어 입대하지만 군에서는 의가사 제대를 시켜버리고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는 복학하지 못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고졸이라는 학력 미달로 기업에는 취업이 어렵고 단순 일자리를 구하려 하면 고학력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어쩔 수 없이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게 된다. 어느 날 자취방에 찾아온 '빚쟁이'들이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라고 다그치고 아버지 때문에 자신들이 처하게 된 곤란을 토로한다. 어찌할 것이 없어 당혹스러운 백이진은 "아저씨들 고통들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정말 어떤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게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약속한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앞으로는 어떤 순간에도 행복을 느껴서는 안된다고 다짐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떤 순간에도 행복해서는 안 된다.' 혹은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생각은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결정과 판단, 심지어 표정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의식하고 있다면 피해 갈 수도 있고 갈등도 하겠지만, 스스로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한 사람의 성격적 특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교류분석에서는 인생 각본, 인지행동치료에서는 핵심신념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인생 각본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는 극중 인물 나희도를 만나게 되고 나희도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근데 너는 이미 그 아저씨들한테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둘이 있을 때는 아무도 몰래 잠깐만 행복하자.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나희도의 제안은 백이진이 갖고 있는 인생 각본에 변화의 불을 지피고 숨통이 트이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약속했던 그 아저씨들 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인생 각본에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드라마는 아직 진행 중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차례 인생 각본을 쓰게 된다. 그러나 그 각본이 합당한 것인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인생 각본의 내용은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므로 상호작용을 통해서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 나를 "좋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만날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