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관련 이야기

대화의 방식: 사랑은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justhong 2022. 10. 24. 11:08

최근 모래시계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어 공유하고 싶다.

우석은 하숙집 주인 선영의 아버지가 임종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구하는 것으로 선영에게 우회적으로 청혼한다. 우석의 말을 듣고서야 선영은 비로소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자기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우석의 청혼으로 다소 해소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장례식장 뒤편에서 조문객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선영과 우석의 대화가 이어진다.

선영: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요 아버지 안심하셨을 거예요.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우석: 무슨 뜻입니까?

선영: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씩씩해요. 혼자 괜찮아요. 걱정 마시고 좋은 분 만나세요. 어울리는 분으로요.

우석: 제 청혼을 거절하는 겁니까?

선영: 아시잖아요. 전 안 돼요. 맞지 않아요.

우석: 제가 싫은 게 아니고요?

선영: 그런... 우린... 데이트 같은 것도 안 했고...

우석: 그런 건 결혼하고 나서 하면 안 될까요?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고.

선영: 진심이세요?

우석: 청혼 같은 거 장난으로 하진 않아요 저.

선영: 하나만 묻겠어요. 절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살림할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우석: 사랑하냐고 묻는 겁니까?

선영: 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진심이 오고 사는 것도 감동을 주지만, 우석의 명료함이 인상적이다. "절 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살림할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라는 선영의 양자택일 질문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으로 정리한다.

누군가 :날 사랑해?"라고 물으면 우리는 무심코 "당연하지" 혹은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기 쉽다. 모래시계의 시대적 배경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전반에 해당하므로 당시에는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던 때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것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간파하는 최소한의 '독심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였다.

감동적인 것은 우석이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을 좀 더 명확히 정의하면서 직접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멋지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우석: 사랑은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노력할 준비도 되어 있고요. 평생 노력할 겁니다.

따져 볼 여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삼단논법에 해당하며 나로 시작하는 자기의 얘기를 하고 있다.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평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고로 나는 '나는 당신을 평생 사랑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명쾌하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지고 거절할 수도 없는 말이다.

이러한 방식의 명료한 대화를 하면 일상에서 겪는 여러 오해나 갈등을 상당 부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