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억이 상기하고 상기하는 리허설의 과정을 거쳐 오래 유지된다면 아픈 기억은 잊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더 오래 기억됩니다. 아픈 기억 중에서 마음에 깊이 남긴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인지기능의 발달이 아직 미숙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생각하지 않아도,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기억되는 묵시적 기억에 해당하며 때로는 악몽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끊임없이 우리 행동을 제약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피하려 하기 때문에 더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피하려면 트라우마가 기억나지 않도록 트라우마를 모니터링하고 통제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트라우마에 대한 내면의 작업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 트라우마가 기억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처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트라우마는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인간상에 반하기 때문에 수용되기 힘든 상처에 해당하고 상처는 아파서 피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트라우마를 생각하다 보면 "한 번 그은 획은 지울 수 없다"라는 드라마 '홍천기'에 나오는 대사가 기억납니다. 상처를 남긴 사건은 화지에 잘못 그어진 획처럼 지울 수 없어 그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 획이 여느 획처럼 전체의 그림에 어울리도록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더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소위 ‘트라우마 작업’에 해당합니다.
트라우마가 이러한 작업을 거쳐 단순한 상처로 남지 않고 하나의 기억으로 정리된다면 더는 피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이것이 ‘트라우마’ 하면 심리상담이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릴리와 찌르레기'라는 영화를 보면 딸을 잃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앞두고 정신과 의사와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분이 안좋아지면 어쩌죠? 행복이 오래 가지 않으면요"
"그럴 수도 있죠"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이 큰 도움은 안됐어요."
"그래도 진전은 있었어요."
"그렇죠. 그게 선생님 덕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예측 가능하죠. 일상의 반복을 받아들여요.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별 생각없이 딸 이름을 말할 겁니다. 자연스럽게. 고통의 과거가 아닌 기억의 단면으로요. 그러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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